명상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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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딴잘리 「요가 수뜨라」에 관한 연구 : '마음작용의 지멸'을 중심으로 자세히보기
  • 자료유형학위논문
  • 저자명정영자
  • 학회/출판사/기관명창원 : 창원대학원, 2009
  • 출판년도2009
  • 언어한국어
  • 학술지명/학위논문주기학위논문(석사)
  • 발행사항창원 : 창원대학원, 2009
  • ISBN/ISSN
  • 소개/요약빠딴잘리 『요가 수뜨라』의 핵심 주제는 ‘마음작용의 지멸(Citta-vṛtti Nirodha)’이다. 수행에 의해 마음작용이 지멸될 때 뿌루샤 Puruṣa(순수의식)와 쁘라끄리띠 Prakṛti(순수물질)는 분리되어 빠딴잘리 요가의 목적인 독존(Kaivalya) 이 이루어져 최상의 행복을 성취하게 되고, 반대로 마음의 작용을 일으키는 마음(찟따 Citta)을 뿌루샤라고 그릇되게 인식하게 되면 괴로움의 연속인 윤회(saṃsāra)의 삶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빠딴잘리 『요가 수뜨라』에 의하면, 애초에 ‘단순한 자아의식(asmitāmatra)’이라는 무지가 있어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는 접촉하여 개체를 탄생시킨다. 그 때 최초로 생겨나는 것이 뿌루샤의 인식능력을 반영하여 자신도 인식능력을 갖게 되는 마음이라는 인식기관이며, 그 것은 오감으로 직접 인지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상, 상상, 꿈, 감정, 사고 등과 같은 비물질적인 대상뿐 아니라, 자신을 인식기관이도록 한 뿌루샤와도 접촉하면서 바른 인식, 그릇된 인식, 상상, 꿈, 기억 등의 기능적인 작용을 한다. 우리가 현상적인 개체로 있는 이상 인식의 결과로 생기는 그러한 작용들 자체가 완전히 소멸될 수가 없고, 그 작용들은 전변함으로 일차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미 괴로움인 그 것에 무지, 아상, 집착, 혐오,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의 번뇌(끌레샤, Kleśa)를 덧칠하는 정도에 따라 그 것은 이차적으로 보다 더 괴롭거나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된다. ‘단순한 자아의식(asmitāmatra)’이라는 무지에 의해 개별화된 개체들 각각에게는 자신의 과거 생 혹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행위의 찌꺼기인 삼스까라 Saṃskāra(잠재인상) 들에 기초한 자기다움 내지 견해라는 아상이 있다. 개체들은 그러한 아상에 기초해서 그 아상을 즐겁게 하는 것은 계속 취하려고 집착하고, 그 아상을 괴롭게 하는 것은 더 이상 취하지 않으려고 혐오한다. 그리고 그러한 집착과 혐오의 밑바탕에는 자신의 존재의 사라짐에 대한 공포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몸과 마음, 또 자신과 관계하는 외부의 대상들은 계속 전변하면서 자신의 그런 집착이나 혐오를 항상 만족시켜주지 않는다. 그 결과 개체는 집착과 혐오 등의 번뇌가 투사된 자신의 인식과 전변하는 실제 현상과의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게 되는 데, 그 것이 곧 괴로움이다. 따라서 집착과 혐오 등의 번뇌가 깊으면 깊을수록 자신의 인식과 실제 현상과의 괴리는 더 깊어지고, 그 결과 괴로움도 더 커진다. 그러나 그 괴리와 괴로움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빠딴잘리가 제시하는 마음작용 내지 마음작용에 투사되는 번뇌를 소멸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 내지 태도는 ‘수련(아비야사 Abhyāsa)’과 ‘무집착(봐이라갸 Vairāgya)’이다. 먼저, 수련은 마음을 안정되게 하려는 노력(자각의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노력)으로, 그 것은 오랜 시간동안 중단 없는 노력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로 수행되어질 때 확고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위한 빠딴잘리가 소개하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아슈땅가 요가 Aṣṭaṅga-Yoga (8枝 요가)이다. 다음 무집착은 5감관으로 얻은 경험과 관습이나 경전을 통해서 취한 즐거움 혹은 경험의 대상을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난 사람에 의해서 확립된 완벽한 통제력으로, 그 것의 최상의 상태는 뿌루샤에 대한 통찰력(앎)으로 인해, 구나(쁘라끄리띠의 속성)에 대한 갈망이 완전히 없어진 경지이다. 이 두 태도에 의해 수행자는 요가의 목적인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독존을 성취한다. 그리고 이런 기본적인 두 태도를 적용하여 이슈와라 Īśvara(자재신)를 상징하는 소리인 Oṁ을,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반복해서 읊조리는 수행법인 ‘자재신에의 귀의(이슈와라쁘라니다나 Īśvarapraṇidhāna)’에 의해서도 그 것은 가능하다. 수행자는 현재의 자신의 모든 몸의 짓, 말의 짓, 호흡의 짓, 감정·사고의 짓 등에 집중하여 그 것들에 포함되어 있는 번뇌들의 씨앗인 삼스까라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림(Abhyāsa) 하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 과정과 그런 경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긍정적·부정적 능력이나 지식에 무집착함(Vairāgya)으로써 자신의 인식에 더 이상의 이차적인 삼스까라를 첨가하지 않는다. 그런 반복적인 수련과 무집착을 통해 자신의 삼스까라들을 점차적으로 소멸시켜, 결국에는 다른 모든 삼스까라들을 소멸할 수 있는 개체 최후의 삼스까라인 ‘뿌루샤와 쁘라끄리띠는 다른 것이라는 지식(viveka khyati)’을 얻게 되는 데, 마지막으로 그런 분별지에조차도 무집착함에 의해 요가의 목적인 독존과 최상의 행복에 이른다. 그렇게 자신의 삼스까라를 소멸하여 자신의 인식과 실제와의 괴리를 없앤 이는 ‘지금 여기’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 있게 되고, 그런 인식은 자신과 타인의 순간순간의 필요(need)에 대한 지혜를 낳고, 그 지혜에 입각해서 자신과 타인에게 그 순간에 꼭 필요한 행위만을 하는 진정한 자비가 생겨난다. 즉 마음작용의 지멸을 위한 수행은 마음의 평정뿐 아니라 지혜와 자비를 낳는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연스러워질 때까지 연습은 필요하다. 그러나 또한 그 연습의 결과로 노력 없이 이어지는 여여함과 그 것으로 인한 충만한 행복에조차도 머무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개체는 소멸의 그 순간까지 단지 알아차림(Abhyāsa)과 무집착(Vairāgya)의 태도로 움직일 뿐이다.